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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봄』 — 〈필리핀 인상〉 | 남국의 땀과 긍지, 그리고 식민의 잔영 본문

기다리는 봄/4부

『기다리는 봄』 — 〈필리핀 인상〉 | 남국의 땀과 긍지, 그리고 식민의 잔영

holyhill 2026. 1. 11. 11:30

🛣️ 『기다리는 봄』 — 〈필리핀 인상〉 | 남국의 땀과 긍지, 그리고 식민의 잔영

안녕하세요. 시인 박영률입니다.

이 시를 쓰며 저는
풍경을 보는 눈이 아니라
역사를 맡는 몸으로 그 땅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남국의 햇볕과 땀,
잠시 쉬어가는 그늘의 평온함 뒤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냄새가 남아 있었습니다.

 

〈필리핀 인상〉은 여행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기독교 시로서의 고백이며,
현실 인식의 현장에서
하나로 선 사상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세 개의 장면으로 분절해 보여 주는 시입니다.
섬과 섬을 잇는 길 위에서
긍지와 상처, 지배와 생존이
겹겹이 보였습니다.

 

📜 시 전문 | 〈필리핀 인상〉


섬섬섬
섬으로 이어진 남국
필리핀 냄새에 젖어
필리핀 땀을 흘리며
야자수 그늘에 잠시 쉬어가는 사람
한국 토건회사가 만든 고속도로를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며
끈질긴 코리안의 긍지를 본다

 


필리핀 특수의 경치와 정취를 먹으며
광활한 푸른 들판으로
코리안이 달린다
땅이 도마뱀처럼 생겨서
도마뱀이 많은 나라
침실에서까지 대접을 받는 도마뱀
도마뱀을 닮은 민족
이 순진한 백성들의 가슴에
누가 칼질을 했는가
누가 총을 쏘고 마약을 먹였는가!
라푸라푸에게 마젤란은 숨지고,
긍지를 갖고 살았던 이 민족
400년간 억눌린 삶, 찌들은 피부
지친 다리를 끌며 끌며
오늘도 열심히들 걷고 있었다

 


거리 거리마다 일본상품 광고
눈에 뜨이는 것은 일본물품
가는 곳마다 파리가 날고
물건마다 파리처럼 붙어서
거리에 메워지는 트라이시클도
야마하, 혼다
야자수의 나라 필리핀에도
日本이 범람하고 있었다

 

🌿 시 해석 — 풍경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남국의 풍경은 배경이 아닙니다.
냄새와 땀, 그늘과 도로는
역사가 몸에 남긴 흔적입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본 ‘코리안의 긍지’는
성취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삶 위에 놓인 현대성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두 번째 장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 가슴에 칼질을 했는가,
누가 총을 쏘고 마약을 먹였는가.
이 물음은 과거를 향하지만
현재를 겨냥합니다.
걷는 몸들, 찌든 피부,
그 생존의 리듬은
억눌린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문학·사상적 맥락 — 기억 없는 발전은 하나됨이 아닙니다

《하나로 선 사상과 문학》의 맥락에서
이 시는 연결과 지배의 대비를 드러냅니다.
섬을 잇는 도로는 연결처럼 보이지만,
광고와 상품의 범람은
다른 방식의 점유를 말합니다.

 

기독교 시로서 이 작품은
정죄보다 기억을 요구합니다.
회복은 망각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역사를 직면할 때에만
진정한 연대가 시작됩니다.
걷는 이들의 속도를 맞추는 일,
그것이 하나됨의 출발입니다.

 

🙏 마무리 — 걷는 사람들의 속도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저는 제 발걸음의 속도를 점검합니다.
누군가는 아직
지친 다리를 끌며 걷고 있는데,
나는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지 않은지 묻게 됩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게 해 달라고,
발전의 이름으로 상처를 덮지 않게 해 달라고,
걷는 사람들의 속도로
함께 가게 해 달라고
오늘도 저는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