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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언덕 박영률의 시집방
『기다리는 봄』 — 〈필리핀 인상〉 | 남국의 땀과 긍지, 그리고 식민의 잔영 본문
🛣️ 『기다리는 봄』 — 〈필리핀 인상〉 | 남국의 땀과 긍지, 그리고 식민의 잔영
안녕하세요. 시인 박영률입니다.
이 시를 쓰며 저는
풍경을 보는 눈이 아니라
역사를 맡는 몸으로 그 땅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남국의 햇볕과 땀,
잠시 쉬어가는 그늘의 평온함 뒤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냄새가 남아 있었습니다.
〈필리핀 인상〉은 여행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기독교 시로서의 고백이며,
현실 인식의 현장에서
하나로 선 사상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세 개의 장면으로 분절해 보여 주는 시입니다.
섬과 섬을 잇는 길 위에서
긍지와 상처, 지배와 생존이
겹겹이 보였습니다.



📜 시 전문 | 〈필리핀 인상〉
Ⅰ
섬섬섬
섬으로 이어진 남국
필리핀 냄새에 젖어
필리핀 땀을 흘리며
야자수 그늘에 잠시 쉬어가는 사람
한국 토건회사가 만든 고속도로를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며
끈질긴 코리안의 긍지를 본다
Ⅱ
필리핀 특수의 경치와 정취를 먹으며
광활한 푸른 들판으로
코리안이 달린다
땅이 도마뱀처럼 생겨서
도마뱀이 많은 나라
침실에서까지 대접을 받는 도마뱀
도마뱀을 닮은 민족
이 순진한 백성들의 가슴에
누가 칼질을 했는가
누가 총을 쏘고 마약을 먹였는가!
라푸라푸에게 마젤란은 숨지고,
긍지를 갖고 살았던 이 민족
400년간 억눌린 삶, 찌들은 피부
지친 다리를 끌며 끌며
오늘도 열심히들 걷고 있었다
Ⅲ
거리 거리마다 일본상품 광고
눈에 뜨이는 것은 일본물품
가는 곳마다 파리가 날고
물건마다 파리처럼 붙어서
거리에 메워지는 트라이시클도
야마하, 혼다
야자수의 나라 필리핀에도
日本이 범람하고 있었다



🌿 시 해석 — 풍경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남국의 풍경은 배경이 아닙니다.
냄새와 땀, 그늘과 도로는
역사가 몸에 남긴 흔적입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본 ‘코리안의 긍지’는
성취의 장면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삶 위에 놓인 현대성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두 번째 장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 가슴에 칼질을 했는가,
누가 총을 쏘고 마약을 먹였는가.
이 물음은 과거를 향하지만
현재를 겨냥합니다.
걷는 몸들, 찌든 피부,
그 생존의 리듬은
억눌린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 문학·사상적 맥락 — 기억 없는 발전은 하나됨이 아닙니다
《하나로 선 사상과 문학》의 맥락에서
이 시는 연결과 지배의 대비를 드러냅니다.
섬을 잇는 도로는 연결처럼 보이지만,
광고와 상품의 범람은
다른 방식의 점유를 말합니다.
기독교 시로서 이 작품은
정죄보다 기억을 요구합니다.
회복은 망각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역사를 직면할 때에만
진정한 연대가 시작됩니다.
걷는 이들의 속도를 맞추는 일,
그것이 하나됨의 출발입니다.



🙏 마무리 — 걷는 사람들의 속도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저는 제 발걸음의 속도를 점검합니다.
누군가는 아직
지친 다리를 끌며 걷고 있는데,
나는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지 않은지 묻게 됩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게 해 달라고,
발전의 이름으로 상처를 덮지 않게 해 달라고,
걷는 사람들의 속도로
함께 가게 해 달라고
오늘도 저는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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